목차
2025년 3월 말, 프랑스 사법당국은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수장 마린 르펜에게 ‘공식 문서 훈령 위반 및 공금 사용 관련 허위사실 유포’ 등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사법적 결정이 아니다. 이는 유럽 내에서 팽창하고 있는 극우 정치 세력에 대해 사법부가 경고를 보낸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마린 르펜은 2010년대 초반부터 아버지 장마리 르펜의 정치 노선을 이어받아 극우 정당을 프랑스 내 주류 세력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난민 반대, 이슬람 혐오, 반EU 등 다분히 포퓰리즘적인 메시지를 통해 중산층과 소외계층의 불안을 자극하며 빠르게 정치적 입지를 확장해왔다. 2022년 대선에서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결선 투표까지 갔을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유럽의회 시절, 보좌관을 개인적 정치 활동에 이용하고도 이를 공식 문서로 위장해 유럽연합으로부터 급여를 받아냈다는 의혹이다. 프랑스 법원은 이러한 행위가 ‘공적 권한의 명백한 남용’이라며 유죄를 선고했고, 그녀의 정치적 신뢰도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 판결은 단지 르펜 개인의 경력에 그치지 않고, 유럽 전반의 극우주의 정치 흐름에 대한 법적·도덕적 브레이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마린 르펜의 유죄 판결은 정치와 사법의 경계에 대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일부 르펜 지지자들은 이번 판결을 “정치적 탄압”이라 규정하며 반발하고 있다. 그들은 기존 엘리트 정치 세력과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불편한 인물’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기존의 반엘리트 정서와 맞물려 또 다른 ‘순교자 서사’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프랑스 언론과 국제 사회는 이번 판결을 민주주의 시스템의 정상 작동으로 평가하고 있다. 공직자가 공공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한 것은 명백한 법 위반이며, 어떤 정치적 배경이든 예외를 둘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 유럽 각국에서 극우 성향 정치인이 대중의 불만을 등에 업고 급부상하는 상황에서, 이번 판결은 “정치적 인기보다 법 앞의 평등이 우선”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메시지로 해석된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독일, 스웨덴 등에서도 극우 정당이 급성장하고 있다. 난민 정책에 대한 반감, 글로벌화에 따른 중산층 붕괴, 지역 경제의 침체 등은 포퓰리즘 정치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되어주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법부의 개입은 정치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법적 처벌이 정치적 프레임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많다. 마린 르펜은 이번 유죄 판결 이후 즉각 항소 의사를 밝히며 “나는 단 한 번도 공금을 사적으로 쓴 적이 없다”며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번 사건은 프랑스 정치의 법적·도덕적 기준을 둘러싼 장기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마린 르펜의 유죄 판결은 단순한 형사 처벌을 넘어, 유럽 정치 전체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표’를 얻기 위해 감정을 자극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정치 행위는 단기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법과 윤리의 장벽 앞에서는 한계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 사법부는 이번 판결을 통해 “법은 모든 정치인에게 공정해야 한다”는 헌법적 원칙을 다시금 선언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판결 이후 프랑스와 유럽 사회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점이다. 극우 정치인에 대한 법적 심판이 단순한 사법 처분을 넘어, 정치적 성찰로 이어지기 위해선 국민들의 의식 변화도 필요하다. 법원이 정의를 실현했더라도, 국민이 여전히 혐오와 배제를 선택한다면 극우는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단지 마린 르펜이라는 인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정치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정치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선택뿐 아니라, 책임 있는 결과를 수반해야 한다. 정치인은 말의 힘을 가졌지만, 법은 그 말을 실제로 책임지게 만든다. 이제 유럽은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혐오의 정치로 회귀할 것인가, 아니면 법과 책임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인가.